시대의 틈에서 타오르는 사랑을 품고 살았던 여성들

※리뷰 전반에 작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린 똑같은 위치에 있어요. 아주 동등한 위치죠. 당신이 날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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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은 화가 마리안느가 초상화의 모델인 엘로이즈를 만나 함께 초상화를 완성해 나가며 서로에게 깊이 빠져드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흔히 화가와 모델의 관계는 화가가 관찰자로서 시선과 권력을 독점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 예술적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고 성장한다. 이는 연출과 대사로도 잘 드러난다. 모델은 언제나 관찰당하는 입장에 놓여있다는 마리안느의 말에 엘로이즈는 모델 또한 화가를 관찰하는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또한 영화는 마리안느, 엘로이즈, 하녀인 소피까지 수평적인 관계로 그려냈다. 제일 신분이 낮은 소피는 자수를 놓고 귀족인 엘로이즈가 식사 준비를 하는 장면과 소피의 낙태에 필요한 약초를 찾을 때 풀밭에서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드는 장면을 통해 남성과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평등한 공동체가 어떤 모습인지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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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화가의 활동은 제한되어 있거든요. 다른 중요한 주제들도 전부 여성을 비껴가요.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8세기 말에는 화가로 활동하는 여성이 드물었고, 여성 화가가 그릴 수 있는 주제 역시 한정되어 있었다. 역사적 사건이나 철학, 인간의 감정 같은 주제를 다룰 수 없었고, 남성의 누드화도 그릴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여성 화가의 제약에 관해 다루면서도 시대의 틈을 파고든다. 소피가 임신을 중절하는 모습을 그려달라는 엘로이즈와 낙태하는 장면을 피하지 않고 응시하는 마리안느의 모습에서 임신 중절의 주체는 여성이며, 여성만이 다룰 수 있는 주제임을 나타낸다. 그동안 매체에서 임신 중절을 다룰 때 실체를 왜곡하여 잔인하게 묘사해 여성의 죄책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고통스러워하는 소피의 얼굴을 아기가 위로하듯 만져주며 평화롭게 담아냈다. 이를 통해 임신 중절은 생명과 대치되는 행위가 아니라 한 생명을 구하는 행위임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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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면 다들 뭔가 창조하는 느낌일까요?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엘로이즈의 초상화는 생명력을 더해가고 마리안느는 화가로서의 예술 세계가 넓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초상화가 완성되면 두 사람은 이별해야 했다. 비록 시대가 정한 운명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지만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했던 둘은 타오르는 사랑을 품고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다.

오직 여성만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여성과의 관계와 사랑을 그려낸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여성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예술이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랑에 빠지면 무언가를 창조하는 느낌일지 묻는 대사는 셀린 시아마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이유와 맞닿아있다고 느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성 주류의 영화 틈에서 성장했다고 말한 그는 여성을 오롯이 사랑하는 작품을 창조해 많은 여성에게 영감을 주고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작품을 본 여성들이 또 다른 사랑으로 창조할 작품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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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감독: 셀린 시아마

출연: 아델 에넬, 노에미 메를랑, 루아나 바야미, 발레리아 골리노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결혼 초상화 의뢰를 받는다. 엘로이즈 모르게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마리안느는 비밀스럽게 그녀를 관찰하며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의 기류에 휩싸이게 된다. 잊을 수 없는, 잊혀지지 않을 사랑의 기억을 마주하게 할 걸작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