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권위가 허용한 '모성의 신'들을 비판하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위대한 생존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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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 중에서 그리스 로마신화를 접하지 않고 자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테나, 메데이아, 카산드라··· 지금도 심장을 뒤흔드는 매력적인 인물들의 이름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신은 어떨까? 한국의 신이라 하면 누구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가?

저자는 나를 알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할머니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2025년인 지금도 매일 여성 살해 사건이 하루에 몇 건씩이나 보도되지만, 옛날에는 기록에조차 남지 않은 사건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옛날의 여성은 글을 배울 가치조차 없는 출산 목적의 가축 취급을 받았으니 말이다. 우리네 할머니들은 그 모든 고난과 고통을 겪고도 살아남은 위대한 여성이며 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승시켰다. 우리는 이 살아남은 위대한 여성 설화를 쫓아가며 나 자신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남성 권위가 허용한 유일한 여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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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신화나 전설은 물론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설화도 설명해 주면서 이 중 할머니로 묘사된 신이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남성 중심의 신화에서는 여성이 늘 젊고 아름답게 그려져 왔지만, 여성 설화의 주인공은 나이 든 여성이라는 것이다. 이를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비판적인 시선으로 해석해 보자. 젊고 건강한 여성(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남자 수발을 들고 아이를 낳아 가사를 도맡을 시기의 여성)이 가정이 아닌 세상을 무대로 남성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젊은 여성이 주인공인 설화를 전부 말살시킨 것은 아닐까. 가부장제에 위협이 되지 않을 나이 든 여성들만을 남겨 모성애 롤을 맡기는 것이다. 근거가 없는 상상은 아니다. 할머니가 주인공인 설화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기꺼이 희생하는 인자함을 기본으로 가진, ‘어머니’의 롤에 충실한 것이 많다. 저자 역시 지혜롭고 용기 있는 여성을 상징하는 것은 좋지만 희생하는 어머니로 묘사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말한다.

물론 개중에는 젊은 여성의 설화도 있다. 제주의 설문대할망이 이끄는 1만 8천의 신 중에는 감은장아기라는 신이 있다. 감은장아기는 “누구 덕에 네가 잘 산다고 생각하느냐”는 아비의 말에 “하늘과 땅의 덕이다, 모부의 덕이 없겠느냐마는 나는 내 복으로 잘 산다”라고 답했고, 그 답에 노한 아비 때문에 집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감은장아기는 굴하지 않고 스스로 부를 이룬다.


여성의 희생은 더 이상 신화가 아니다

이번에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바리데기’의 이야기를 해 보자. 바리데기는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로 아비에게 버려지고, 아비를 구하기 위해 아들을 일곱이나 낳는다. 결국에는 신이 되긴 하지만 여성주의자로서 매력적으로 느끼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저자는 바리데기가 안타깝지만, 그 자발적인 희생 역시 본인의 몫이며,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충분할까. 여성 혐오적인 시각에서 그려진 수많은 설화-심청이, 선녀와 나무꾼, 바리데기 등-를 떠올려 보라.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설화, 여성이 남자를 위한 출산과 희생의 도구로 그려지는 설화를 적극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을까? 우리는 현실에서도 이미 충분히 많은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 설화와 신화는 본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변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원전 그대로 전해져야 할 이유는 없다. 하물며 그 원전이 지극히 여성 혐오적이라면, 딸에게서 딸로 전해줄 가치가 없는 이야기는 과감히 버리거나 고쳐 써야 한다. 다음 세대들에게 물려줄 유산이 부끄럽지 않도록.




한국의 할매신을 만나다: 여성, 나 자신을 찾아서

이 땅의 소녀들이여, 여성들이여, 우리가 잊었던 이 땅의 할매신들을 보라. 세상을 탄생시키고 만물을 보듬어 키운 그녀들의 품속에 다시 안기자. ‘진정한 여성의 힘’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걸크러시 한국의 할매신들을 차례차례 만나러 가자.

다큐작가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 40대 여성인 저자가 탐색한 잊혀진 한국의 할매신들! 제주의 여신들, 산의 여신들, 바다의 여신들, 가택 여신들을 위시한 우리나라 주요 신들은 여신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흥미롭게도 주로 할머니신들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 등 서구의 여신들은 한결같이 젊고 아름다우며 성적 매력이 넘친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신들은 왜 할머니신들일까? 우리나라 주요 여신들인 마고할미 · 설문대할망 · 백주또할망 · 영도할매 · 정견모주 · 노고할미 · 삼신할매 · 미륵할미 · 개양할미 · 영등할미 · 망구할매 · 골맥이할매 · 조왕할미를 책 한 권으로 만나는 오늘, 진정한 여성의 힘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특별한 날이 될 것이다. 한국출판문화진흥원 ‘2022년 인문 교육 콘텐츠 개발 지원 사업’ 최종 선정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