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고 푸르른 과학계의 별, 그 너머의 고통과 희망

시대의 억압을 딛고 ‘별’이 된 마리 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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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면 시대나 나라를 초월해서 그 사람이 정한 대로밖에 부를 수 없거든요

그게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이건 이방인이건 여자건 누구나요

마리 그거 꼭 해요 이 지도에 꼭 별처럼 이름을 남겨요

당신은 우리 폴란드의 별이 될 거예요

마리퀴리 ‘모든 것의 지도’ 中

마리 퀴리가 청소년이던 시절,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고 폴란드인들은 모국어와 역사조차 자유롭게 배우지 못하는 민족말살의 시대를 겪고 있었다. 남성만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기에 마리 퀴리는 고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 시대에 여성이 과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무시와 편견을 감수해야 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적 억압과 차별에도 마리 퀴리는 라듐을 발견함으로써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수상한 유일한 인물이자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평범한 위인전이 아니다. 이 작품은 마리와 시계 공장의 직공 ‘안느’와의 우정, 그가 일생 동안 여성 과학자로서 마주했던 여성 혐오, 그리고 그것에 맞서 꿋꿋이 걸어온 그의 삶의 궤적을 그려낸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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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제 자리를 잃었을 때

수 많은 별들 사이를 헤맬 때

내가 너의 곁에 있어 줄게.

(…)

길을 잃은 날 의심할 때

너는 나보다 더 날 믿어줬지

내가 언제나 넌 크고 환한 별

너의 믿음이 날 어디든 가게 해

마리퀴리 ‘그댄 내게 별’ 中

여성의 대학 진학이 허용되지 않는 조국을 떠나 프랑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기차에 오른 마리는, 우연히 같은 폴란드인인 ‘안느’를 만나며 극은 시작된다. 실존 인물이 아닌 가상의 인물인 안느는 마리의 가장 단단한 버팀목이자 벗이며, 삶의 고뇌와 진실을 마주하게 만드는 존재다. 두 사람의 복잡하고 단단한 우정을 축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기차에서의 만남 동안, 안느는 원소 기호를 발견하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하는 마리를 ‘별’이라 부른다. 안느가 마리에게 붙인 ‘별’이라는 호칭에는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마리는 자신을 ‘이상한 괴짜, 떠도는 이민자, 설쳐대는 폴렉’이라며 자조하지만, 그는 여성 혐오가 만연한 사회 속에서 감히 허락되지 않은 과학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여성들의 롤모델이며, 안느가 자신을 투영한 대상이자, 폴란드인의 희망을 상징하는 존재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리의 꿈을 누구보다 응원했던 안느는 라듐을 사용하는 공장에서 일하다 방사선에 노출돼 고통받는 직공 ‘라듐 걸스’ 중 한 명이다. 안느는 마리를 믿고 지지했지만, 그의 결과물이 오히려 자신을 해치는 현실 앞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새로운 갈등과 통찰을 맞이하게 된다. 안느의 존재는 마리의 내면을 끊임없이 흔들며, 과학자의 윤리와 책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여전히 남겨진 질문, 우리가 나아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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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모든 것

믿을 수가 없어

내기 보는 모든 것

믿기지가 않아

넌 얼마나 위험한 거야

그것이 사실일까

왜 나는 몰랐을까

반대편 얼굴을 보고 있어

마리퀴리 ‘또 다른 이름’ 中

마리 퀴리가 라듐을 발견한 지 120여 년이 지났지만, 이공계에 진출한 여성들은 여전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견고한 남성 카르텔의 벽에 가로막힌다. 성과를 내더라도 ‘여성 과학자’라는 수식어가 반드시 따라붙고, 이는 곧 이공계가 아직도 남성의 영역임을 강하게 방증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아 성취를 이룬 여성에게 ‘무려 여성이 이런 성과를 거뒀습니다’라는 찬사가 붙는 현실은 그들을 과연 한 사람의 과학자로 대하고 있는 것인지 되묻게 한다. 여전히 여성은 ‘예외적인 존재’로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고 각자의 전문분야에서 차별받지 않으며, 단지 실력과 성과만으로 평가받는 날은 과연 언제쯤 올까. 뮤지컬 ‘마리 퀴리’는 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반복되고 있는 이 여성 혐오를 되짚으며,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마리 퀴리

작, 작사: 천세은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 김소향, 리사, 정인지

안느 코발스키: 김히어라, 이봄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