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는 누구의 욕망인가?

대상화와 로맨스, 권력자가 된 듯한 착각
작가는 치유와 위로가 아닌 회복을 말한다. 회복은 당연히 누려야 하는 지위와 상태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구덩이를 벗어나 산을 오르는 자는 자기 홀로 들어가 있는 치유의 구덩이와는 달리, 산을 오르는 자가 자신뿐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작가는 가부장적인 기존 동화의 고통과 아픔의 구덩이에서 벗어나 고원으로 나아가는 여성 주인공들을 통해 회복을 이야기한다.
많은 여성들이 어릴 적 백설공주 이야기를 접하며 자랐을 것이다. 백설공주의 어머니인 왕비는 눈에 떨어진 핏방울을 보고 피처럼 붉은 입술, 눈처럼 새하얀 피부, 흑단처럼 검은 머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기를 바란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외모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욕망한다는 점에서 백설공주는 어머니의 욕망을 투영한 대상이며, 이 이 이야기는 결국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대상화를 드러내는 서사임을 시사한다.
대상화는 무엇인가? 이것은 사랑과 로맨스의 구분에서 시작한다. 사랑은 당연하지만 로맨스는 그렇지 않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겨나지만, 관계는 철저하게 제도에 구속된다. 그리고 가부장제는 여성들이 맺을 수 있는 관계를 극도로 제한한다. 로맨스는 서구에서 고작 수백 년뿐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마저도 남자의 자의식이 성장에 따라 발전해 왔다. 남자라는 개인이 ‘여성’을 대상화하면서 표현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여성들은 남자가 만든 기준(이상)에 맞추기 위해 그에 맞지 않는 자신을 자르거나 늘려 붙였다. 신데렐라의 언니들이 유리구두에 발을 넣기 위해 발뒤꿈치를 자른 것과 같다. 이렇게 여성은 남자에 의해 감정을 투사당하는 성애의 대상이 되어왔다.
다시 백설공주 이야기로 돌아가 대상화되는 여성들의 유형을 살펴보자. 백설공주의 어머니 왕비는 태어날 아이의 외모에 대해서만 욕망한다. 이 욕망은 그 본인의 것인가? 자신이 갇혀 있는 가부장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가 내면화된 것인가? 왕비는 자신이 품은 욕망이 사실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 채 순응하는 여성답게 조용히 죽어 이야기에서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 욕망의 대상인 백설공주는 어떤 존재인가. 백설공주가 죽은 뒤 일곱 난쟁이가 그의 시체를 유리관에 넣어 전시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유리관에 전시된 아름다운 여성. 즉 남들에게 내보일 만한 자랑스러운 트로피로 전시된 백설공주는 일곱 난쟁이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왕자에게 양도된다. 이렇게 남자에게 욕망당하고 대상화되며 이상화되는 것을, 오히려 여성들이 스스로 권력으로 착각하고 욕망하게 되는 구조다. 계모 왕비는 어떤가? 계모 왕비는 거울에 매달려 아름다움을 구걸하는 여성이며 동시에 악역으로 유명하다. 계모 왕비가 판에 박힌 현모양처 캐릭터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쌍년이 되는 것은 해답이 아니라는 작가의 말 그대로, 여성은 유구하게 성녀 아니면 창녀, 천사 아니면 쌍년으로 살아와야 했다. 물론 둘 다 가부장제에서 만든 대상화다.

그래서 대상화는 어떻게 로맨스에 이어지는가? 대상화된 여성과, 그 여성들을 마음껏 취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로맨스’라는 만능 해결법을 덧씌워 대상화의 문제점을 읽지 못하게 만든다. 로맨스에 기만당하면 여성은 자신의 욕망이 아닌 남자의 욕망에 기대어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랑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상대를 성애의 대상으로 삼으며 대상화하는 것은 문화적인 기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애화와 대상화에 예민해지고 여기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음을 작가는 지적한다. 여성은 왜 로맨스에 쉽게 환상을 가지고 빠져드는가? 로맨스를 통해 거머쥐는 가짜 권력(자신을 욕망하는 권력자의 숭배, 이상화, 대상화)이 달콤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대상화, 즉 로맨스에서 빠져나와야 자기 가치를 향해 달려갈 수 있다. 지금까지 여성들은 영웅이 되지 못했고, 스스로도 되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단순히 고통을 지워내는 치유를 넘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회복의 여정을 걸어야 한다. 모든 여성들이 자신의 얼굴을 갖기를 바란다.

인간이 아닌 전리품으로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
남성 집단 문화에서는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예쁜 여자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아니, 요즘은 여자가 보상 개념조차도 아니다. 자신이 그 어떤 성취를 하지 않았더라도 여자를 당연히 취할 자격이 있으며, 그에 응하지 않는 여성들은 살해당해 마땅하다는 분위기가 사회에 만연해 있다. 포털 검색창에 ‘안전이별’, ‘왜 안 만나줘’를 검색하면 무수하게 많은 여성들이 그저 남성의 구애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고, 지금도 위협을 당하고 있다. 작가는 남자들이 사회적 성취를 하지 못해 열패감이 드러나고, 이 열패감을 여성에게 돌릴 때 여성 혐오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진짜 분노의 대상인 알파메일 대신 만만한 존재-여성-에게 열패감의 탓을 돌린다는 것이다.
여성은 이렇듯 노골적으로 남자에게 착취당하는, 인간 이하의 가축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네가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지 않아서 그렇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여성이 그저 데이트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또는 연인이었던 남자에게 이별을 고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피해자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 여성해방을 외친다면 여성을 애완동물처럼 키우고 있는 그 남자가 바로 가부장제의 일원이라는 불편한 사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여성은 생존하기 위해서 남자를 보이콧해야 하지만 남자를 거부하면 살해당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사냥감이다. 이 사냥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여성주의자들은 이미 다양하게 제시해왔다.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다루었듯 대상화에서 벗어나는 것, 남자로부터 욕망당하는 것이 자신의 진짜 욕망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은 이미 한국에서 워마드를 통해 4B4T (혹은 6B4T)라는 근본적 여성해방의 실천방법으로 추려졌다. 이는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다. 모든 여성이 이 여성혐오를 종식시키려는 조별과제에 참여한다면 가부장제를 무너뜨리는 것도 환상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언어로 말하라 - 회복의 서사
여성은 어떤 여정을 거쳐 성장하는가? 작가는 내면의 숲으로 떠났다가 돌아옴으로써 여성들이 성장한다고 말한다. 숲으로 들어가는 여성의 성장담 중에는 빨간 모자가 있다. 빨간 모자는 혼자 사는 할머니를 만나러 숲으로 들어갔다가 늑대라는 위험과 마주친다. 앞서 말했듯 숲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내면, 즉 무의식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빨간 모자가 무의식에서 가장 먼저 조난 신호를 보낸 것은 할머니-즉 내면에 있는 오래된 지혜다. 늑대는 이 내면의 지혜를 먼저 잡아먹어 빨간 모자라는 자아를 마음대로 휘두르려 한다. 그리고 사냥꾼이라는 초자아가 등장해 빨간 모자(자아)와 할머니(지혜)를 구한다. 빨간 모자의 이야기는 자아와 지혜와 욕구와 초자아가 어우러지는 내면의 대통합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아름다운 바실리사가 있다. 계모와 의붓 언니에게 구박당해 궁지에 몰렸으나 여러 고난을 이겨내고 계모와 의붓언니를 불태워 죽인 후 자신의 뛰어난 실력을 이용해 마침내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다. 바실리사가 사는 세계는 단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다만 바실리사가 바뀌었을 뿐이다. 바실리사는 뒤늦게 눈뜬 능력을 발휘해 사회에서 지위를 획득해 행복해진다. 이렇게 여성은 자기 속에서 답을 찾아내고 성장해 ‘회복’의 여정을 걷게 된다.
회복의 서사에서 뜨개질은 ‘이야기를 만드는 여성’의 은유로 등장한다. 남자 위주의 서사만이 글로 남겨져 전해져 왔음을 우리는 이미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입에서 입으로 비밀스럽게 전해지던 이야기의 시대가 가고 이제는 여성들이 글을 쓰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우리는 여성주의 운동을 자신의 언어로 남겨야 하는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SNS는 우리 사회에 빼놓을 수 없는 큰 부분이 되었다. 사람들은 SNS를 통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의 글을 쉽게 읽고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영향력이 큰 사람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전해 확산력을 더하고 그것을 자신의 의견인 양 베껴 말하는 것은 진정 자신의 목소리라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남의 말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발화해야 한다. 현실의 권력에 “No”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언어를 가진 자다. 영향력 있는 사람의 의견을 따라 말하는 것으로는 자신의 힘을, 자신의 언어를 기를 수 없다. 그리고 여성들은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이 여성혐오 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크고 작은 여성혐오는 대개 공통적인 경험이지만 개개인이 겪은 이야기는 그 개인들만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말하고, 기록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힘이다.

숲은 깊고 아름다운데: 동화 여주 잔혹사
전래 동화에서 용은 왜 공주만 잡아가는 걸까? 백설공주는 숲으로 도망쳤고, 빨간모자는 숲을 지나가야 한다. 전래 동화의 여주인공들은 집 떠났다 하면 죄다 숲으로 가는 걸까? 아니, 왜 여주인공들은 모두 곤경에 빠지는 거지?
지금 21세기의 우리에게 전래 동화는 무슨 의미일까? 옛이야기는 권력자의 논리를 전하는 통로인 동시에 이야기를 전하는 이들의 지혜가 숨어 있는 보물창고이다. 이제 우리는 《숲은 깊고 아름다운데》와 함께 옛이야기가 전하는 삶의 무기를 찾아내자.
참고
와카이브 〈숲은 깊고 아름다운데〉
이미지 출처
Walt Disney Productions. (1937). 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 [Film]. RKO Radio Pictures.
Walt Disney Pictures. (1989). The Little Mermaid [Film]. Buena Vista Pictures.
최정동. (2018년 7월 9일). [서울 대학로에서 ‘불법촬영 성 편파수사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는 영 페미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