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히 나를 제물로 바쳐?
※ 작품 전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위험에 처한 여인을 구하는 기사도 이야기는 많지. 이건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사악한 용에게 잡혀간 아름다운 공주를 구하는 멋진 왕자님이 등장하는 동화가 참 많다. 이번 영화에도 공주, 용, 왕자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그런 이야기를 철저히 깨부수는 이야기다.
척박한 왕국의 공주 ‘엘로디’에게 어느 날 이웃 나라에서 청혼서가 날아온다. 엘로디는 결혼이 내키지 않지만 결혼하면 황금을 받아 굶주린 백성을 살릴 수 있다는 말에 결국 청혼을 승낙한다. 예정대로 결혼식이 진행되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깊은 협곡으로 들어간다. 의식의 마지막 단계에 왕자가 엘로디를 안아 올리더니 그대로 구덩이에 던져버린다. 구덩이에 던져진 엘로디는 배신감에 몸부림치는 것도 잠시, 자신을 죽이려는 용에게 쫓겨 정신없이 도망친다. 엘로디는 지금까지 수많은 여성들이 결혼에 속아 용의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을 속인 왕국에 복수하기 위해, 지금까지 희생된 무고한 여성들을 위해 반드시 탈출하겠다고 결심한다. 과연 엘로디는 동굴을 탈출할 수 있을까?



난 탈출할 거야. 목숨을 빼앗긴 모든 무고한 여성을 위해서
영화 〈댐즐〉의 제목 ‘Damsel’은 ‘시집 안 간 처녀’라는 뜻의 단어이다. 이 제목은 영화를 모두 보고 나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영화 내내 결혼이 여성을 어떻게 옥죄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인공 엘로디가 청혼을 받아들인 이유가 나라에 대한 의무감과 아버지의 강요였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두 왕국 모두 공통적으로 나라의 위기 상황에 약자인 여성을 희생시켜 해결한다. 엘로디의 아버지는 바닥난 왕국의 재정을 채우기 위해 딸을 넘겨주고 황금을 받았다. 이웃 나라는 그들 조상의 잘못으로 분노한 용에게 여성을 제물로 바쳐 왕국을 유지해 왔다. 이 모든 억압의 기반에는 결혼이 있었다. 이는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움직임을 제한하는 코르셋과 겹겹이 싸매는 드레스를 입히는 장면에서 정점에 달한다. 코르셋과 드레스는 이후 엘로디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이것들을 모두 벗어던진 엘로디는 비로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탈출을 향해 나아간다.


여성을 희생시켜 유지한 세계에 종말을 고하다
엘로디가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엘로디 개인이 강해서가 아니라 앞선 여성들의 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도 이 영화가 여성 서사로서 갖는 의미를 더해준다. 용의 동굴에 대한 정보를 담은 지도와 이정표 같은 앞서 싸웠던 여성들의 기록이 위기의 순간에 엘로디를 구했다.

이들의 연대로 결국 탈출에 성공한 엘로디가 무고한 여성들을 착취해 유지한 왕국의 역사에 종말을 가져올 불꽃으로 돌아왔다.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통쾌함과 카타르시스는 특히 오늘을 사는 여성들에게 더 크게 다가왔으리라 생각한다. 이 영화는 마치 여성주의의 역사를 동화의 형식을 빌려 보여주는 것 같다. 지금은 기나긴 동굴을 지나는 듯해도 언젠가는 그들의 세계를 무너뜨릴 기회가 반드시 온다고 힘주어 말하는 듯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여성들에게 헌정하는 최고의 여성 서사라고 감히 자부한다.



댐즐
감독: 후안 카를로스 프레스나디요
출연: 밀리 바비 브라운, 앤절라 배싯, 쇼레 아그다슐루 등
제작사: 넷플릭스
매력적인 왕자와 결혼하게 된 젊은 여성. 그런데 신부가 아니라 불을 내뿜는 용에게 바칠 제물이 되면서, 꿈꿔왔던 결혼이 순식간에 치열한 생존 싸움으로 변한다.